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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진)에 들어있는 사내다움

Categories: 캐리비안, 트리니다드 토바고, 개발, 건강보건, 교육, 디지털 행동주의, 시민 미디어, 아이디어, 여성/ 젠더, 역사, 예술/ 문화, 청년, The Bridge
Jason Leung이 찍은 청바지 사진, Unsplash에서 퍼옴. [1]

Jason Leung이 찍은 청바지 사진, Unsplash에서 퍼옴.

이 글은 Promundo가 원래 출판 [2]했다.  “/masc: conversations on modern masculinity.”  간략하게 편집된 내용을 허락하에 여기 게재한다.

“사내 노릇해!”라고, 내 친구가 또렷하게 큰 소리로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경찰관이 말했다. 경찰관은 그 금요일 오후 나의 학교 근처에서 벌어질거라고 들은 격투에 대해 묻고 있었다. 한편, 그 길 윗 쪽에는 학교 교복을 입은 사내아이들이 철봉, 각목, 개 사슬, 동내 가게의 병들, 그리고 칼을 갖춘 전투 태세로, 묵묵히 대비하며, 도로변에 서 있었다. 15이나 16 또래의 걔네들은 “사내 노릇” 하느라 바쁜 애들이었다.

언어는 웃기는 것이다. 정규 교육은 우리에게 표준 영어를 가르친다. 문학과 영어 시간에, 산문 교정과 암송으로, 우리가 “중류, 교양있는, 탈식민지 남성”이 될 것을 장려했다. 그렇지만, 모국어 (“Creole” [3])에 능통한 애들은 표준 영어만 쓰는 애들은 상대도 안했다, 그들은 우리 모두가 “이 문화와 이 땅!”의 사내들이기를 요구했다.

말투를 바꾸는 것은 사회적 상황 뿐 아니라 말하는 상대방에게도 달려 있다. 한 번은 두 순경이 길거리에서 몇 명의 소년을 “행동이 수상하다”는 이유로 줄세웠다. 그들을 사춘기 소년들 얼굴에 총을 겨누며 손을 머리 위로 올리고 무릎을 꿀라고 했다. 그 아이들 중 하나가 매번 지시를 존중하며 고분고분 따른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표준 영어로 소통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받은 반응은, “말투가 왜 그래? 너 사내 애들 좋아하냐?”  표준 영어 –이것은 그를 가난하고, 무식하고, 정부 폭력의 대상인 무리로 부터 소위 구별하는 것이었는데– 이 젊은이를 더 안전하게 해 주지는 못했다.

나는 남자라는 것이 정확히 무언지 한 번도 자리잡고 앉아 써 본 적 없다.  사람에 따라 다르고, 시간과 상황에 따라 바뀔 수 있는 성인 남자 에 대한 제멋대로의 정의와 의미를 요약한 –“남자다움”–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나는 몰랐다.  우리에게 “남자 되라”고 외치는 명령은 우리 안에 남자 됨됨이 DNA가 이미 생존하고 있고, 때로는 활성 대기 중” 이라는 것을 전제했다.

남자가 된다는 것은  우리가 강하고, 확실하고, 주도권을 쥐고 지배적이라는 것을 뜻했다. 그렇지만 남자다움은 마치 청바지처럼 우리 몸에 끼워 맞추려는 성인 남자에의 한 이상이었다. 이러한 남자다움 청바지들은 세월을 통해 나에게 대를 물려 내려져왔다. 시간의 개념, 특히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공포가 성인 남자에게 중요하다. 가부장 사회의 문화는 사내 아이들이 최대한 빨리 남자가 되도록 몰아친다.

소년들은 그 또래나 선배들로 부터 자신의 “남자다움”을 인정받으려 노력한다. 이것은 여성 한부모 가족들에 대한 적대적인 공공 담화를 부채질한다. 사내 아이들은 적시로 알려진 때에 사내다움의 척도에 부응하게 동행하지 않은 것에 대해 자신의 어머니를 비난하는 걸 배우며 자란다. 여성의 자애로운 돌봄과 그 모범을 따르던 “엄마 치마 폭에 싸인 사내 녀석” 중에서, 나중에, 그런 가르침을 배반하기도 한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또 다른 “여성-핑게”이다.

어머니들이 어떤면에서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에게 해로운 가부장제도를 지킨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여성은 궁극적으로 남성 지배적 문화만큼 효과적으로 가부장적 아들들을 길러내지 못한다–남성 주도의 폭력과 갈등, 여성과 어린 소녀들 상대의 성 폭행, 그리고 사회적 단체적 공간에서의 양성애적 남성 문화의 폭력적 규제는 여성들이 하는 일이 아니다. 이 딜레마의 중심에는 지배적 가부장적 문화에 상반되는 사회적 공간과 경험을 즐길지는 몰라도, 그런 환경에 참여하면 더 연약해진다는 깊은 공포심을 지니면서, 가부장적 환경 대처하기에 부적합하게 느끼는 성인 남자들이 있다.

지난 2년 동안 트리니다드와 토바고에 500건이 넘는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물론, 어느 정부도 범죄 문제 [4]에 “팔 걷고 나서기”는 원치 않지만 이 정부는 대국적 총기와 마약 거래 [5]를 주선하고 계약 [6] 공채에 있어서 기업적 규모의 부패를 일삼고, 자원 결여된 도심지 지역사회에 갱단 구성 [7]과 사회 계층, 출세 여부와 기회를 토대로 사회적 분리선을 긋기 위해 증가된 ‘폐쇄적 공동체”를 조성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 바, 언제나 도덕성 결핍과  태만한 자식교육 [8]을 이유로 공공에게 책임 전가 [9]하는 것이 답변이다. 정치적 기능장애와 공공의 안전을 창조하는 정부의 취약성의 표징으로, 살인, 강간, 경찰의 만행 [10] 그리고 사회적 “불의”는 대개 조사나 처벌없이 넘어간다. 우리가 국민으로서 최소한 할 수 있는 일은 고인을 추모하고 인간 생명의 가치에 다시 수렴하여 통치권의 부실 행정 업무를 폭로하는 것이다.

자기 배우자를 살해 [11]한 딱한 남자들이 언급하기에 너무 많다. 지난 1월 한 사건 [12]은, 한 여인이 해로운 관계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 후, 그녀의 전배우자가 몇 달 동안 온라인으로 스토킹하고 그 후에, 그녀의 일터로 가서, 그녀를 두 번 쏘고 자살했다,  오전 8시경, 누구는 방금 첫 잔의 커피를 마셨을 시간, 누구는 이미 출근했겠고, 어떤 여학생들은 어떤 택시를 탈지 정하기 전에 택시 정류장에 줄 서 있는 남자들의 얼굴을 조사한다: “누가 젤 덜 무서운가?” “저 사람 본 적 있어.” “단지 많이 늙었다고 강간자 아닐거라고는 못해.”  8시 쯤, 나는 운전해서 수업에 간다. 맘 끌리는 여자가 걸어가는 걸 보면 클랙슨을 한 번 누른다, 두 번, 만약 그녀가 정말 끝내주는 존재로 나를 뿅 가게 하면, 나는 그 소음의 괴롭힘으로 그녀의 고막과 평화를 포격할 욕구를 느낄테니까. 이러한 일상적인 일들이 어떻게 죽은 여자에게 연결되는지 보지 못한다면 당신은 “남자 되는 것”이 포함하고 은폐하는 것을 무시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행진 [12]이 그들의 권리가 정부와 사회 일반인들로 부터 인정되고 보장되기 위해 진행될 때, 왜 그들이 “성인 남자들은 어디에?”라고 하냐고 묻는다.  “남자들이 다 나쁜건 아니”라는 그들의 보상적 외침을 정말로 믿기에는 행진하는 사람들, 공공을 위한 결속의 전시, 그리고 그 동지들이 너무 미흡하고 소수이다.

아마 목청을 높여 행동해야 할 남자들이 너무 조심스럽기 바쁜가보다, 맞지 않는 청바지의 지퍼를 억지로 올리고, 아니면, 잠자코 있으려고, 이러한 옷치레의 가망없는 결점을 무시하면서. 남자다움이 역사를 거쳐 물려받은, 바뀌지 않고, 불가피한 우주의 진리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인류의 시체 안치소이다. 우리에겐 개인적 그리고 정치적 선택이 있다. 우리 청바지는 언제고 던져 버릴 수 있다, 특히 맞지 않으면, 아니면, 패션에 맞게 개조하는 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사내다움처럼–우리의 책임이고 우리의 자유이다.